그러나 과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을 하면서 논쟁이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다.
150년이 지난 현재의 역사가들 역시 이 시기를 평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아울러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때 일본의 대규모 파병과 함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근대화의 실패가 식민지화와 반(半)식민지화를 야기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그러나 과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을 하면서 논쟁이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다.19세기 말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였다.
내부 문제로 무너져가고 있었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었다.기본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악질적인 식민지화 과정이었다.
해외 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다양한 요인 중 어느 하나를 더 강조할 수는 있지만.군국주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건만.
러·일전쟁으로 재미를 본 일본의 군국주의 열차가 폭주하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패망에 이르는 과정을 읽지 못하고 미국과 영국을 귀축이라고 비판했다.결국 이들 중 일부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겨 은사금을 받고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청년들을 동원하고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길을 걸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랜트의 중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류큐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었던 중국의 지도자 리훙장은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였고.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